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40 중반까지 한국에서 지내다
1998년 초에 가족과 함께 이곳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리석은 삶의 연속이었다.
나는 3대째 기독교 집안의 8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초 중고시절을 지나며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에 참여하였다.
절기마다 행사에 소극적이나마 참여했다.
유약해 보이면서도 내면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고 성실하고 정직하였다.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 5년간의 투병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오시게 되면서 나의 쉼터요 보금자리인 가정은 자취를 감추고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에 방황의 세월이 있었다.
깊고도 어두운 방황이었고 이러한 세월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안에 남아 나를 다소간 간섭하고 있다.
그때부터 교회는 일 년에 몇 번 정도 나아가는 것이 고작이었고,
수년간 교회를 멀리한 시간도 있었다.
그 후 40여 년간 나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채로 죄와 더불어 살아갔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는 나의 삶으로 영혼은 메말라 피폐하여지고
특히 이민 후에, 고달프고 외로운 생활과
많은 것들을 잃어가며 삶에 대한 의욕과 소망 대신
절망과 슬픔과 어두움이 나의 마음을 덮어갔다.
우울증과 함께 오랜 세월을 걸쳐 지인들과 친지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리고 한 집에서 사는 식구들과도 대화가 단절되어가고
세상에 나만 홀로 외롭게 서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는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붙잡아 일으키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내올 수 있었으며
이무렵 홀로 집을 나와 길거리에 몸을 의탁하는 홈리스들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들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편, 내가 이대로 삶을 마감하면 자녀들이 아빠를 떠올릴 때,
아빠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일까를 생각하면
자녀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그리고 나만 믿고 이곳 미국까지 따라온 아내와는
사이가 나빠져 몇 달씩 대화 없이 지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자녀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덜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되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 는 머나먼 곳으로 날아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혼자서 살다 죽고 싶었다.
나와 내 가정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위하여 삶을 살아갈 기회는 이제 없는 것인가 하는 좌절이 나를 감싸곤 하였다.
무의미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나의 모습이 왜 이리 초라한지.
이민 후에, 요리사, 스몰 비즈니스, 재정(보험) 설계사, 수영장 청소, 창고 인벤토리,
부동산 중개인, 대형트럭 운전, 덴탈 랩 딜리버리와 테크니션 등
참으로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익히는 것이 힘들었고 익히고 나면 얼마 못 가서 그만두곤 하였다.
이곳에서는 한국신문 미국판이 있어 가끔 마켓에서 사서 보는데
어느 날 신문에 수영장 청소권(pool cleaning service) 판매라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전화를 걸어 광고주를 만나보았다.
6개월 정도는 안하던 일을 익히느라 힘이 들지만
고비를 잘 넘기면 경기에도 둔감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좋은 스몰 비지니스라는 설명이 나의 마음을 끌었고
사람들과 접촉이 없이 혼자서 하는 일이라 더욱 마음이 끌렸다.
일하는 시간이 좋고 시간적인 여유도 가질 수 있으며 비교적 수입도 좋아
이것, 저것을 잘 뜯어 고치는 자에게는 아주 좋은 일거리이며
이 비지니스는 아직도 대다수의 백인이 하고 있고 적지 않은 한국인들도 섞여서 하고 있다.
나의 경우에, 집에서 전기도 제대로 못 만지는데 과외 일(extra job)이 생기면
뜯고, 전기 만지고, 교체하고, 파이프 작업하는 것들이 겁부터 나서
3년이 지나도록 잘 아는 사람을 불러서 같이 일을 하곤 했는데
그 바람에 수입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일 또한 나의 선천적 기술 부족 과 어깨 고장으로 인하여 결국 내려놓아야 했다.
이렇게 고달픈 이민자의 삶이 계속 이어져가는 가운데,
가족과의 관계도 점점 더 단절되었다.
나의 영혼은 메마를 때로 메말라 호흡만이 붙어있을 뿐,
아무런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없었고 순간순간의 삶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제 곧 이 무의미한 삶을 하나 님께서 거두어 가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
이 일, 저 일을 거쳐 나에게는 너무나 힘이 들었던 바퀴 18개가 필요한 대형트럭을 몰기도 하였다.
이 일로 심장병이 생겨 몇 번 위기의 순간을 운전 중에 겪게 되었으며
이일도 결국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에, 사랑하는 딸이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제 사회에 나아가 일이 생기면 돈도 벌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연약해 질대로 연약해진 나의 심신에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딸이 엄마 아빠에게 청을 한다.
살아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일 년 동안 선교지에 나아가 봉사하고 오겠다는 것이다.
딸이 대신 집안을 이끌어 주기를 바랐던 나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지경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안된다고 잘라 말할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그래 다녀와라!’할 수도 없 는 상황이다.
딸이 어렵게 선교이야기를 꺼낸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론 많이 서운하기도 하였고 돈을 벌 환경이 되었으니
직장을 갖고 부모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기를 바랐다.
또한 내가 일을 잃은 상황에서 딸이 선교지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정말로 더 이상 삶을 지탱해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가지 말라 고 말하고 싶었으나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딸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대면하여 말하기 거북하니 글로 선교 계획에 대한
딸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쓴 것이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이 들지를 잘 알기 때문에
가야 되나를 놓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많이 하며 응답을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씀하셨고,
‘네가 나가있는 동안에 너의 가족은 내가 지켜주겠다.’는
응답을 확실히 받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딸의 답답한 마음이 나에게 부담이 되어
동네 근처 의 월남 국숫집에 데려가
국수를 먹으며 오랜만에 딸과 대화를 하였다.
나의 솔직한 심정과 왜 가기를 원치 않는지를 말하여 주는데 자꾸만 눈 물이 솟구쳤다.
딸도 눈물을 자꾸만 흘리어, 서둘러 월남 국숫집을 나와서 집 근처 공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아빠가 너무 치쳐서 살아갈 의욕이 없고 네가 우리 집안의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딸이 아빠의 아픈 마음을 들어줄 만큼 성장한 것이 대견하기도 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하였다.
딸에게 지금도 선교를 보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는 확신이 없다고 하였다.
딸이 다시 찬찬히 말해 주었다.
딸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선교지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것이 확실하고,
사실 아빠를 위하여 선교지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며
아빠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 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거역할 수가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딸에게 6개월만 있다가 올수 있느냐? 고 물었다.
딸은 여러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그렇게 해보겠다고 하였다.
나도 그리고 딸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딸이 선교지로 떠날 날이 다가와
온 식구와 딸이 속하여 있는 교회 사람들이 공항에까지 눈물의 배웅을 하고 돌아왔다.
딸의 선교지에서의 안부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신앙생활로
딸에게 선교지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자꾸만 생겼다.
집에 돌아와 딸을 지켜 주시고 우리 집안을 구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대형트럭 운전을 그만두고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나이를 고려하여
집에서 가깝고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와는 거리가 먼 조건의 일도 두 달 여 동안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딸이 떠난 다음날, 인터넷에서 덴탈 랩 일이 하나 떴다.
전화를 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고 즉시 달려가 인터뷰를 하였는데
나이가 많아서 인지 연락할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였다.
이 일이 나의 일 같으니 꼭 나에게 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사장으로부터 ‘내일부터 나와 보라’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가벼웠다.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을 책임져 주신다는 딸의 말이 떠올랐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나의 마음에 짙게 드리워 있던 먹구름은 엷어져갔다.
덴탈 랩에서 일을 하던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전에 경험하였던 심장의 이상이 찾아왔다.
피곤이 겹치고 일이 갑자기 밀려들어 며칠 과로를 하여서일까.
금방 정신을 잃을 것 같았고 30분간 아무리 진정을 하려 해도 안 되어
사장한테 사정을 호소하고 마침 집에 있던 아들에게 전 화를 하였다.
‘아빠가 몸이 안 좋아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 와서 데려 가 달라’고.
아파트 주차장에 와서도 어지러워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혈압을 재어보니 평소보다 40~60은 혈압이 떨어져 있었고,
맥박은 110 정도를 오르내리며 맥이 뛰었다 말았다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무보험 환자에게 잘 대해준다는 한인 의사를 찾았다.
진단 결과 부정맥 같은데 지금은 모든 게 정상이니
24시간 심전도 검사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3주간 심전도로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처방을 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다음 날에도 이미 한번 요동을 친 심장은 정상으로 움직이고 있어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루었다.
고마운 것은 초음파, 심전도, 피검사 등 각종 진료비가 많을 터인데
보험이 없는 나에게 10%도 안 되는 $70만 내라고 하였다.
너무나 고마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전에도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때우던 나를
병으로 하나님께서 빨리 데려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 땅에서 남은 나의 삶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지길 원하심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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